정철훈(시인) / 누에의 꿈

어느 날부터 나는 커피 향이 스멀거리는 마포의
옥외 커피점에 앉아 있기를 좋아하게 되었다

실내와 실외를 구분 짓는
그 어중간한 경계에는 아무 선도 없지만
내 몸이 그 선에 얹혀 있다는 게
커피 향과 더불어 자유를 떠올리게 한다

(…중략…)

나는 그 자리에 앉아 하나의 점으로서
오가는 행인들의 이동을 내 몸에 묶어 본다
그들의 슬픔과 기쁨, 만남과 헤어짐, 열정과 냉정 같은 것들

그러면 내 몸을 당기는 무한한 선들이 생겨나
나는 그 선을 당겼다 늦췄다, 묶었다 풀었다 하면서
하루 같지 않은 하루를 그냥 보내는 것이다

나는 그 무수한 선을 뽑는 한 마리 누에가 되어
꿈틀대면서 환희의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
무심코 선 하나를 내 쪽으로 당겨 보기도 한다
선이 선을 달고 딸려 오다가 뒤엉킨다

선들이 엉키면 엉키는 대로
아침은 아침대로 좋지만 오후의 때가 되면
커피 향의 질감이 조금은 무거워지고
내 몸에 묶인 선들도 조금은 낭창낭창 헐거워져 좋은
오후의 한때를 즐겨 보는 것이다

영혼 같은 게 있다면
영혼은 밝으면 별반 쓸모없는 게 되고 말 것이기에
나는 영혼이란 놈이 좀 어두컴컴하게 숙성되기를
그 옥외 커피점에 앉아 기다려 보는 것이다

§ 삶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입니다.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처럼 비교적 가벼운 선택도 있지만, 직장을 옮기는 일이나 결혼처럼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선택도 허다합니다. 우리가 무언가 한 가지를 선택하는 순간 나머지 경우의 수, 그 숱한 가능성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맙니다. 그것을 알기에 우리는 늘 선택 앞에서 망설입니다. 하나의 길을 결정한다는 것은 동시에 내가 걸어가지 못할 길들을 골라 버리는 일이기도 하니까요. 우리는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을 한다지만 그 결과가 항상 만족스럽지는 않습니다. 내가 살지 못한 인생을 두고 아쉬움과 후회에 잠기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.

선은 점들의 집합입니다. 무수한 점들이 촘촘히 모여 하나의 선을 이룹니다. 낱낱의 점들이 우리가 쉼 없이 하는 선택이라면 선은 그것들이 모여 만드는 인생길일 것입니다. 이 시의 화자는 “하나의 점으로서 / 오가는 행인들의 이동을 내 몸에 묶어”보고 있습니다. 무언가를 선택하지 않아도 좋은 여유로운 한때를 거리를 지나는 사람을 지켜보며 보내고 있습니다. 화자는 낯선 이들의 삶을 상상하는 일을 선이 당겨지고 늦춰지고 묶었다 풀리는 일에 비유합니다. “무수한 선을 뽑는 한 마리 누에가 되어” 타인의 삶에 공감하는 것은 그들이 해왔던 선택에 응원과 위로와 연민을 보내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.

‘선을 넘다.’라는 관용어가 있습니다. 한계를 넘거나 금기를 어겼을 때 주로 쓰는 말입니다. 이때의 선은 여기와 저기, 이쪽과 저쪽, 아군과 적군, 긍정과 부정 따위를 구분하는 표지입니다. 이 선은 그 자체로 이분법적 판단을 뜻합니다. 「누에의 꿈」의 화자는 ‘아무 선도 없는 어중간한 경계’에 있습니다. 그는 “내 몸이 그 선에 얹혀 있다는 게 / 커피 향과 더불어 자유를 떠올리게 한다”라고 얘기합니다. 화자가 자유를 느끼는 이유는 실내와 실외, 즉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 선택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일 겁니다. 커피 향이 이곳과 저곳을 분별하지 않고 멀리 퍼져나가는 것처럼 말이죠.

[이미지는 빈센트 반 고흐의 〈밤의 카페 테라스〉]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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